[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알고보면⑹ 강대국 맞선 강직한 리더 있다

이은별 고려대 언론학 박사
우분투추진단

입력 : 2025.07.10 07:00:04


이은별 박사
[이은별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에서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로맨틱한 순간이 아니었다.

바로 영국과 미국 정상이 벌이는 정치적 신경전이었다.

영국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미국 측 의견만을 관철하던 삐걱거림 속에서 양국 정상은 기자회견장에 선다.

이때 영국 총리(휴 그랜트 분)는 오만한 태도를 교묘히 감춘 미국 대통령의 외교적 수사에 휘둘리지 않고 품위 있게 맞선다.

"우리(영국)는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너리, 해리 포터의 나라입니다.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 그리고 왼발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닙니다.

그런 친구는 힘에만 반응하기 때문에 저도 이제부터 훨씬 더 강해지려 합니다" 이는 영국의 자존심과 품격을 지키는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비록 영화 속 연출된 장면이지만, 실제 국제 무대에서도 강대국의 압박에 위축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아프리카 리더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최근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남아공 라마포사 대통령 간 정상회담장은 '남아공의 백인 농부 학살'에 관한 미국의 일방적인 면박 주기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라마포사 대통령은 감정적으로 격양되지 않은 채 논리적으로 사실관계를 짚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남아공은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고 무지개 나라로 민족적 통합을 이끈 현대사를 가졌다.

이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모욕적 언사에 대처하는 라마포사 대통령의 차분함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이 같은 사례는 한국의 국제뉴스에서는 잘 보도되지 않지만, 외교 현장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다.

2018년 11월 나미비아의 하게 게인고브 전 대통령은 독일 정치인이자 전 독일 연방하원 의장인 노르베르트 람머트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미비아 내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지나친 대(對)중국 의존을 우려하는 발언에 단호하게 응수했다.

게인고브 전 대통령은 "우리가 나미비아를 찾는 독일인과 다른 방문객들을 반기듯, 중국인 역시 환영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지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는 나미비아의 대중(對中) 외교 정책에 간섭하려는 독일에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동시에 1884∼1915년 나미비아를 식민 지배했던 독일의 제국주의식 태도를 거부하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23년 3월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 자리에서 '프랑스아프리카'(Francafrique)에 기반한 프랑스의 영향력 행사에 대해 비판받았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신식민주의식 내정 간섭은 여전히 아프리카를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낡은 시각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아프리카인들에게 이러한 고압적 자세는 불편함을 넘어 굴욕감마저 안겨준다.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의 발언도 여전히 회자된다.

그는 2002년 9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를 향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당시 블레어 총리는 짐바브웨의 토지개혁 정책과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무가베 전 대통령은 "블레어 총리, 당신은 당신의 영국을 지키고, 나는 나의 짐바브웨를 지키겠다"고 맞받았다.

이는 더 이상 짐바브웨와 영국이 식민주의적 관계가 아니므로, 짐바브웨는 주권 국가로서 과거 식민지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독립은 곧 식민주의 잔재를 청산하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립을 통해 자기만의 발전 방식을 꾸려나가는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구의 노골적인 오만함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아프리카 역내 분위기이자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라고도 할 수 있다.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 흉상
짐바브웨 치퉁귀자 아트센터(Chitungwiza Arts Centre)의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 흉상.37년 장기 독재자이면서 동시에 강대국에 맞섰던 그를 후대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2025.1.18.필자 촬영) [이은별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사자가 글을 배우기 전까지, 모든 이야기는 사냥꾼을 영웅으로 그릴 것"이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이때 사자는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침묵 당한 아프리카 대륙을, 사냥꾼은 이들을 억압해 온 강대국을 각각 상징한다.

따라서 이 속담은 아프리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외부 시선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다시 말해 외부 권력에 맞서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제아무리 동물의 왕 사자라도 타인이 주도하는 대로 끌려간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20세기 식민지 해방 때까지 수 세기 동안 누적된 억눌림의 역사를 견뎌왔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를 상대로 무신경하게 행해지는 배제와 무례한 시선은 일순간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들의 뼈아픈 시간을 들춰내는 결례일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을 대표해 사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직한 리더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한다.

아프리카 알고보면, 강대국에 맞서 작지만 강한 목소리를 내는 리더들이 있다.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은별 박사 고려대 언론학 박사(학위논문 '튀니지의 한류 팬덤 연구'), 한국외대 미디어외교센터 전임 연구원, 경인여대 교양교육센터 강사 역임.

에세이 '경계 밖의 아프리카 바라보기, 이제는 마주보기' 외교부 장관상 수상, 저서 '시네 아프리카' 세종도서 선정 및 희관언론상 수상.

eunbyully@gmail.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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