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삼성 운 띄운 이재용·수소 도원결의 정의선…총수가 직접 ‘공급망 파트너’ 챙긴다

박소라 기자(park.sora@mk.co.kr), 신윤재 기자(shishis111@mk.co.kr), 이승훈 특파원(thoth@mk.co.kr)

입력 : 2025.08.03 21:08:59
이재용·최태원·정의선, 일본과 협력

이재용, 도쿄 오테마치서 ‘제2일본삼성’
정의선·도요타, 수소차 표준 선점 협공
SK·LG, 일본 전담조직·테크데이로 진격
총수 외교, 산업 판도를 바꾸는 비밀 회동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과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이 2019년 7월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만찬을 위해 회동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올해 6월 도쿄 고쿠분지에 있는 히타치제작소 중앙연구소에 낯선 손님이 대거 등장했다.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단이 연구소 시설을 둘러보고 협업이 가능한 분야에 대해 히타치 측과 논의를 한 것이다.

히타치는 2009 회계연도에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인 7873억엔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후 과감한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을 통해 ‘V자’ 회복을 일궈낸 곳으로 유명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히타치 경영진과 만나왔으며, 이번에는 그룹 계열사 사장단과 함께 히타치 사례를 공유했다.

이에 앞서 노태문 삼성전자 DX부문장 직무대행은 DX부문 주요 임원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미래의 단면을 보여주는 엑스포 관람을 통해 삼성전자 디바이스 임원들의 상상력을 키우려는 목적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와 경영진의 일본 방문이 부쩍 늘고 있는 장면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정밀 부품, 배터리 소재, 모빌리티 등 미래 산업의 설계도를 함께 그릴 ‘기술 파트너’를 찾아 주요 그룹 수장들이 잇달아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총수의 움직임은 산업 전략과 공급망 재편을 좌우한다. 그만큼 한일 산업협력은 단순한 조달을 넘어 기술을 공동 기획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함께 구축하는 ‘전략 동맹’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7박8일 일본 출장을 갔다 왔던 이재용 회장 [사진 = 연합뉴스]


이 회장은 지난해에만 일본을 12차례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서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매년 4월 경영진이 바뀌는 일본 기업을 찾아 상견례 행사를 하는 ‘신춘 인사회’도 빼놓지 않고 있다.

도쿄 오테마치에 있는 미쓰이물산 본사 내에 이 회장의 개인사무실도 새롭게 마련됐다. 해당 공간에는 일본에서 이 회장의 업무를 보좌하는 조직 등이 함께 입주했다. 2012년 구조조정 차원에서 삼성 계열사 18개가 집결된 일본삼성을 해체한 삼성은 이번 오테마치 사무실 개소를 계기로 ‘제2의 일본삼성’이 탄생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삼성은 과거부터 일본을 핵심 기술 파트너로 중시해왔고, 이 회장 역시 그 흐름을 직접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은 2023년에는 삼성과 일본 부품업계 간 민간 협력 네트워크인 ‘LJF(Lee Kunhee Japanese Friends)’ 교류회 30주년 행사를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LJF는 이건희 선대회장이 1993년 삼성전자와 일본 전자업계 부품·소재 기업 간 협력 체제를 제안하며 출범한 모임이다. 이건희 회장이 시작한 이 모임은 오랜 기간 양국 간 신뢰를 상징해왔다. 한국과 일본에서 번갈아가며 열리는 행사다. 올해 10월께에도 LJF가 국내에서 개최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과 일본의 연결고리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을 중심으로 히타치, 소니 등 일본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 사례를 집중 분석해왔으며 이 회장은 히타치, 소프트뱅크 등 현지 기업과 접점을 넓히며 현지 네트워크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반도체, 에너지, 인공지능(AI) 분야를 중심으로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며 두세 달에 한 번씩 일본 출장을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은 지난 5월 인사에선 박상규 전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를 일본 사업 담당으로 새롭게 배치하기도 했다. 박 사장은 SK그룹 내 일본 사업을 총괄하며 현지 사업 기회 발굴과 파트너십 확대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앞서 SK는 2021년 일본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 투자법인’을 설립한 바 있다. 올해는 이를 통합해 한 단계 키운 SK재팬을 설립했다. 4대 그룹 중에서 그룹 차원의 일본 조직을 가진 곳은 SK가 유일하다. 도쿄 히비야 사무실에는 최태원 회장의 집무실도 갖춰놓고 일본 기업과 협업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7일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현대 N x 토요타 가주 레이싱(Hyundai N x TOYOTA GAZOO Racing) 페스티벌’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도요다 아키오 일본 도요타자동차그룹 회장이 함께 이동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세계 1·3위 완성차 그룹 오너 간 협력도 최근 한층 속도를 내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그룹 회장과 함께 ‘수소 생태계 구축’을 핵심 의제로 긴밀한 협력에 나서고 있다. 두 회장은 최근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례없는 ‘직접 교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그룹과도요타는 사실상 글로벌 수소차 시장을 이끄는 양대 축이다.

현대차그룹은 2030년까지 약 11조원을 투자해 차세대 수소차와 연료전지 기술을 개발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글로벌 수소 시장 파이’를 키우기 위해 현대차그룹과 도요타는 충전 인프라스트럭처 구축과 글로벌 기술표준 논의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도요타와 협력은 기술 영역을 넘어 정책과 제도까지 아우르는 ‘수소 동맹’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의 전략 아래 전장 부품 사업을 중심에 두고 일본 완성차 업체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LG그룹은 요코하마에 LG 일본 연구소를 세워 수소 기술과 차량 부품 연구개발(R&D)을 집중하는 동시에 도요타·혼다 본사에서 LG 전장부품을 소개하는 ‘테크데이’를 잇달아 개최하며 실질적인 공급망 확대를 추진 중이다. 단순 부품 조달을 넘어 기술을 함께 설계하고 개발하는 ‘공동 기획형 협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주요 기업들의 이러한 변화가 한일 산업 관계 전반의 구조적 전환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라고 분석한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총수들이 주도하는 한일 경제협력은 장기 저성장을 겪는 양국 기업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며 “한일 경제협력은 공급망 리스크, 글로벌 거버넌스 재편, 첨단산업 전환 등 네 가지 기회 요인이 있지만 경제안보 제약과 산업구조 유사성, 미·중 패권 변수 같은 구조적 한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 산업계가 과거 일방적인 조달 위주의 수직적 거래에서 벗어나 밸류체인을 함께 기획하고 설계하는 수평적 파트너십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단순한 구매·공급 관계를 넘어 기술 주도권과 개발 방향까지 공유하는 협업 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 간 외교보다 총수 중심의 산업 외교가 더 빠르고 실질적으로 산업 생태계를 움직이는 양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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