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야 투자도 하지”...몸 웅크린 기업들, 빚 돌려막기 급급
명지예 기자(bright@mk.co.kr)
입력 : 2025.04.30 18:49:00
입력 : 2025.04.30 18:49:00

불황 장기화로 인해 신용등급 하락 위기에 처한 A사. 지난달 만기가 돌아온 공모채를 현금으로 상환했다. A사는 공모채 발행이 여의치 않자 올해 들어 단기 사모채와 기업어음(CP)을 800억원 넘게 발행했다.
B건설사는 최근 12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추진했다가 일정을 연기했다. 실적이 상승세임에도 부동산 경기 악화에 자금 조달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처럼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 일정을 연기하거나 발행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금리가 인하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경기 침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투자 의욕이 위축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불확실한 시장 환경에서 적극적인 시설투자보다는 기존 부채 상환(차환)에 집중하고 장기자금보다는 단기자금으로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받는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30일 금융감독원 집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발행된 일반 회사채 중 80% 이상이 기존 부채 상환에 쓰였다. 회사채는 크게 차환(기존 채무 상환), 운영, 시설투자 목적으로 구분된다.
올 1분기 발행 물량 약 23조3700억원 중 대부분인 약 19조원이 차환에 쓰였다. 운영자금 중 LG에너지솔루션의 북미 합작법인 증권취득자금인 1조1250억원을 제외하면 발행된 총 회사채 중 85%가 차환에 쓰인 셈이다.
1분기 발행 물량 중 차환 비중은 2022년 66%에서 2023년 82%로 급증했다. 기준금리가 본격 하락하기 시작한 2024년 1분기 차환 비중이 76%로 소폭 줄었지만 올해 다시 급증했다. 이는 그만큼 기업들이 신규 투자보다는 기존 부채 상환에 집중하며 보수적인 자금 운용 전략을 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설투자 비중은 3%에 그쳐 최근 5년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통상 1분기는 기업들이 연간 자금 계획을 집행하는 시기로, 회사채 발행의 성수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상황이다. 회사채 시장은 신용평가사의 평가를 통해 유효등급을 보유한 비교적 건전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통로다. 만기에 따라 1년 이하 단기채, 1~5년 중기채, 5년 이상 장기채로 구분되며 이 중 중기채 비중이 95%로 압도적이다.
기업들이 장기채 발행을 꺼리는 가운데 단기자금 조달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사채(전단채)의 순발행은 5조621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1분기 13조원 이상이 순상환된 것과 대조적이다. 91일물 기준 CP 금리는 올해 초 3.51%에서 현재 2.91%까지 떨어져 조달 비용이 저렴해진 상황이다.
단기자금 조달도 비교적 우량한 기업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는 장기채 발행에는 신중하지만 단기 유동성 확보도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앞두고 ‘버티기’에 들어간 셈이다.
회사채 발행 환경은 우호적이다. 통상 회사채는 3년물 발행이 가장 많은데 2022년 발행된 3년물 만기가 속속 돌아오는 와중에 당시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 사이 기준금리는 1%포인트 이상 높아졌지만 AA-등급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오히려 0.3%포인트 낮아진 상황이다. 이처럼 유리한 회사채 발행 환경에도 기업들이 자금 운용에 신중한 행보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경기 침체로 인한 실적 악화 우려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0.2%를 기록했다. 연간 성장률도 당초 한은 전망치인 1.5%를 밑돌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분위기는 기업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3월 1000대 기업 중 1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는 응답이 31%로 ‘호전됐다’(11%)보다 세 배가량 많았다.
올해 자금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본 기업도 36%에 달했다. 자금은 필요하지만 선뜻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관망하는 분위기가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에 소극적인 이유는 경기 침체로 인한 투자 수요 감소와 추가적인 금리 인하 기대에 따른 선조달 수요 위축 때문”이라며 “여기에 미국발 대외 변수와 국내 정치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긴축경영 기조가 확산되고 5월 정기 신용평가에서의 등급 하락 우려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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