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낼 자금 마련하려고 은행대출 받고 공장설비 팔고 주식물납한 10곳 중 4곳 폐업 세계 최고수준 상속세율 기업투자 막고 일자리 날려 OECD 수준으로 세율 낮추고 회사 팔때까지 과세 보류해야
◆ 상속세 개편 골든타임 ◆
경기 파주의 금형업체 A사. 매출 200억원대의 건실한 회사였지만 상속세를 내느라 은행 대출을 30억원 받은 뒤 불어나는 이자에 허덕이고 있다. 이곳 대표는 "해외 주문량 증가에 맞춰 대출을 받아 설비 투자에 나서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가업승계 탓에 대출을 받아 세금을 냈다"면서 "세금 독촉에 투자를 미뤄야 하는 현실이 이해가 안 간다"고 토로했다.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인한 폐업도 속출하고 있다. 2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1997년부터 작년 9월까지 주식 물납으로 상속세를 낸 기업 311곳 중 휴·폐업한 회사는 126곳으로 40.5%에 달했다. 대부분 상속세를 내고 수년 안에 문을 닫았고, 서너 달 만에 파산한 회사도 있었다.
건설기자재 업체 B사는 지난해 문을 닫았다. 건설경기 악화, 금리 상승 등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오너 일가 지분율 감소에 따른 리더십 부재 여파가 컸다. 2013년 세무서에서 30억원의 상속세를 통보 받았는데, 현금이 없어 지분 31%를 물납했다. 지분율이 떨어지자 2세들의 경영 의지가 약화됐다. B사 대표는 "피땀 같은 지분을 물납한 후에는 내 회사도 아닌데 인생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상속·증여세는 기업승계의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여기에 최대주주의 주식은 20% 할증해 평가한다. 최대주주는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 주식 가치를 20%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인데, 이 경우 2세 경영인이 감당해야 할 상속세 최고세율은 60%에 달한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상속세율 인하를 부자 감세로 취급하는 정치권의 주장에 중소·중견기업 오너들은 억울할 따름이다. 현금이나 부동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단순 상속과 기업승계는 구분돼야 하기 때문이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단순 재산 상속과 기업승계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르게 과세한다"며 "기업승계는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통해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금 여력이 있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사업자의 자산 대부분이 공장 땅과 설비이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이 낮은 편이다. 그나마도 상당 부분은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는 게 현실이다. 사업용 자산 규모만 크고 현금이 거의 없는 중소기업 사업자가 상속세를 내기 위해서는 사업용 자산을 매각하거나 대출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경영 안정성을 저해하고,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2세 경영인인 심재우 삼정가스공업 본부장은 기업승계를 범죄로 보는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럽다. 심 본부장은 "장수기업이 세금도 더 내고 고용도 더 창출하고 있다"며 "기업승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역사가 오래된 기업일수록 더 많은 수익을 거둬 많은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고용도 많이 한다. 중기중앙회 조사 결과 업력 10년 미만 기업이 내는 법인세는 평균 5500만원이지만, 30년이 넘은 기업의 평균 법인세 납부액은 17억3800만원으로 32배나 많았다. 고용 규모 역시 10년 미만 기업은 평균 14명에 불과했지만, 30년 이상 기업은 평균 146명이나 됐다.
전문가들도 상속세율 완화를 주문하고 나섰다. 심충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가치가 오를수록 상속이나 증여 때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난다"며 "이 때문에 오히려 기업가치를 낮추고, 주가 상승을 억제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과도한 상속세가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중대한 원인이라는 얘기다.
중견·중소기업계는 정치권에 가업승계 세제 개편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지난 21일 연임에 성공한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상속세 최고세율을 인하하고, 최대주주 할증 평가를 폐지하는 한편 가업상속공제와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 특례 지원을 확대하는 등 기업을 일으켜 세울 전향적인 상속·증여세 개편안을 통과시켜달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중견·중소기업계가 요구하는 가업승계 세제 개편 방안은 크게 △최고세율 인하 △자본이득세 전환 △유산취득세 전환 세 가지다.
자본이득세는 기업을 승계할 때는 상속세를 유예해주다가 최종적으로 승계를 포기하거나 회사를 매각할 때 그동안 내지 않았던 차익에 자본이득세를 매겨 세금을 걷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승계가 원활해지고, 상속세 부담 때문에 지분을 매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현행 상속세는 사망한 사람이 물려준 유산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유산세 방식을 적용한다. OECD 회원국에서 상속 관련 세금을 부과하는 24개국 중 유산세를 적용하는 나라는 미국·영국·덴마크·한국 4개국에 불과하다. 나머지 20개국은 유산취득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유산취득세는 전체 유산이 아닌 각자 물려받은 유산만큼 세금을 내는 제도다. 현행 증여세도 유산취득세 방식이 적용된다.
유산세에서 유산취득세로 전환되면 납부해야 하는 세금이 감소하는 효과가 생긴다. 피상속인 전체 재산이 상속인들에게 분산되면서 과세표준이 내려가고 세율도 낮아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