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남는게 없다”...실적 쌓기에 몰두하다가 미래이익 헌납한 한수원

유준호 기자(yjunho@mk.co.kr)

입력 : 2025.03.31 19:53:30 I 수정 : 2025.03.31 23:05:43
“웨스팅하우스 분쟁 해결해달라”
체코 측 요청에 정부˙한수원 적극 대응
수익성 낮춰 향후 원전 수주 걸림돌 제거
‘K원전’ 독자기술 주장도 포기한 셈
일각선 “분쟁상태 해결로 원전 수주 자유로워져”


한국수력원자력이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협의에서 다소 불리한 조항을 수용한 것은 체코 원전 수주 최종 계약을 위한 ‘고육책’으로 평가된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분쟁이 체코 원전 수주 계약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체코 원전 수주의 어려움은 극복했지만, 한수원이 약속한 일감 보장과 기술사용료 지급 등은 향후 K원전 수출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31일 원자력 업계에 따르면 체코 정부는 지난해 7월 한수원을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계약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이후 “최종 계약 전까지 웨스팅하우스와의 분쟁을 해결하라”는 요청을 지속했다. 마침내 지난 1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지식재산권 분쟁이 타결되자 체코 총리와 산업부 장관은 “체코에 좋은 소식”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수출하려는 ‘APR1000’ 모델이 자사의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근거로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가진 원전 기술이 미국의 수출 통제 대상으로, 신고나 허가 없이 수출은 불가하다며 2022년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한수원은 독자 기술로 APR1000을 개발했다고 맞섰지만, 팽팽한 평행선을 이어 가는 상황에서 눈앞에 닥친 체코 원전 수주를 원만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관련 분쟁을 서둘러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11월 ‘한미 원전 수출·협력 원칙 관련 업무협약(MOU)’을 통해 지식재산권 분쟁 해결의 단초를 마련했고, 올해 1월 미국 정권 교체 직전에 최종 서명까지 마무리했다. 서명 일주일 후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지식재산권 분쟁 최종 타결 소식을 전했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체코 입장에서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자유진영의 원전 ‘톱2’ 국가를 제치고 한국을 선택했는데, 미국과 한국 간 교통정리 없이 원전 최종 계약을 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체코 원전 수출이 시급했다고는 하나, 한수원의 양보가 과도했다고 평가한다. 프로젝트당 8억달러의 일감 보장과 지식재산권 사용료 1억5000만달러로 인해 세계 원전시장에서 한수원의 운신 폭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전체 건설비의 7~8%를 차지하는 핵연료봉을 웨스팅하우스에서 공급받기로 한 점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원전 수출의 경우 계약 규모가 수십조 원에 달하지만 제대로 된 이익을 낼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공사 기간만 10여 년을 훌쩍 넘기는 데다 현지 사정에 따라 공사비가 추가 발생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UAE)의 바라카 원전도 매출은 22조6000억원에 이르지만 누적 매출 이익은 지난해 상반기 기준 3300억원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용 문제에 더해 원전 기술 주권을 스스로 내려놨다는 점도 문제다. 한수원은 ARP1000의 국산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독자 수출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지만 웨스팅하우스의 지식재산권을 인정함으로써 K원전이 미국 수출 통제 대상임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됐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한미 원전 협력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만, 상황이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한수원이 독자 수출에 대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은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향후 국내 원전 기술 개발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사고저항성핵연료(ATF) 등 우리나라도 2032년을 전후로 핵연료 기술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다”며 “웨스팅하우스의 핵연료봉을 의무 사용하게 된다면 국내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데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원전 업계 일각에서는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주의 ‘데자뷔’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당시 한전과 한수원은 국내 최초의 원전 수출이라는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지식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는 웨스팅하우스에서 냉각재 펌프와 터빈 등 기자재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당시 웨스팅하우스는 총사업비 186억달러 중 약 20억달러를 가져갔다.

다만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이번 지식재산권 합의 상세 내용이 모두 공개된 것이 아니라서 종합적인 손익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한수원의 부담이 일부 가중되더라도 ‘K원전 생태계’ 전체를 두고 보면 한국이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이유에서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설계 능력만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건설과 주기기 등의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오히려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지식재산권 분쟁 상태가 지속될 경우 우리의 수출 기회가 줄어들 수 있어 사전에 지식재산권 분쟁을 해결한 것은 향후 원전 수주전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 면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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