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오는 24일이면 경기 화성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에서 근로자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화재가 발생한 지 1년이 됩니다.
화재는 군납 기준과 납기일을 맞추는 데 급급해 안전수칙을 뒷전으로 하다가 벌어진 참사로 드러났습니다.
연합뉴스는 참사 배경과 관련 중대재해처벌법 사건 재판 상황을 되짚어보고, 우리 사회에 남은 과제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살펴보는 기사 2편을 일괄 송고합니다.]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화성=연합뉴스) 김솔 기자 = 1년 전 경기 화성시에 있는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화재는 이 업체의 공장 3동 2층에 쌓여 있던 리튬 배터리 더미에서 시작됐다.
첫 배터리 폭발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폭발이 이어졌고, 이후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발생하면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상황이 담긴 CCTV 영상을 보면 배터리 폭발이 시작된 지 불과 42초 만에 작업장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차 내부는 암흑으로 뒤덮인다.
폭발이 발생하자 공장 관계자들은 주변에 쌓인 완제품들을 치우거나 분말 소화기를 뿌리며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번지는 화마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리튬 배터리 화재의 경우 일반적인 진화 방식으로는 불을 완전히 끄기가 어렵고 초기 불길도 매우 거세 소방 당국의 진압 작전에도 어려움이 컸다.
이 화재 사고로 23명(내국인 5명, 중국 국적 17명, 라오스 국적 1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8명이 다쳤다.
경찰 수사 결과 화재는 리튬 배터리의 군납 기준을 맞추려는 욕심에 근로자의 안전을 뒷전으로 두면서 불거진 총체적인 인재(人災)로 드러났다.
아리셀은 군에 배터리를 납품하기 시작한 2021년부터 군납 기준을 맞추기 위해 검사용 시료를 바꿔치기해 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국방기술품질원(기품원)의 품질 검사 전 밀봉돼있던 시료의 봉인을 몰래 뜯은 뒤 미리 준비한 품질 검사용 전지로 바꿔치기하고, 훼손 방지를 위한 서명을 위조하는 방식이었다.
타 기관으로부터 받은 시험성적서의 데이터를 조작해 기품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화재 사고 약 2달 전에는 기품원 측에 의해 이러한 불법 행위가 들통나면서 아리셀은 앞선 납품분을 재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새로운 납품분의 납기일까지 다가오자 아리셀은 일평균 생산량의 2배인 '하루 5천개 생산'이라는 목표 아래 제조 공정을 무리하게 가동하기에 이른다.
이 공장에서는 참사가 발생하기 불과 이틀 전 발열전지 1개가 폭발해 불이 난 적도 있었으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경찰은 숙련되지 않은 일용직 근로자들이 투입돼 수작업을 하던 중 제품의 절단면에 뾰족한 형태의 잉여 부분이 발생했고, 이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금속 이물질과 함께 폭발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공장 내 대피로 역시 제대로 조성돼있지 않았다.
불이 난 공장 작업장에 설치된 출입문 일부는 피난 방향과 반대로 설치돼 있었다.
항상 열릴 수 있어야 하는 문에는 보안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근로자들은 배터리 폭발 시 즉시 대피해야 한다는 안전지침조차 교육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최초 폭발이 발생한 시점부터 출입문을 통해 근로자가 마지막으로 대피하기까지의 골든타임 '37초'를 놓쳤다.
아리셀 화재 사고 이후 당국과 각계 기관을 중심으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각 부처와 소방당국, 지방자치단체는 관내 전지업체 및 유해화학·금속성 물질 취급 사업장에 대한 긴급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국방부도 부대 내 리튬전지 보관시설에 대한 안전점검에 나섰다.
정부는 지난해 9월 위험성이 높은 전지공장을 '화재안전 중점관리대상'으로 지정해 매년 안전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또 리튬전지 등을 '특수가연물'로 지정해 관리를 강화하고, 리튬 등 위험물 저장·처리시설에 화재 위험이 높은 샌드위치 패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소방청은 리튬 사고 발생 시 대원들의 임무와 역할을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지침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주노동자의 안전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확산했다.
법무부는 지난해 9월 이민자 사회통합 프로그램에 '안전보건기본교육' 과정을 신설했으며, 고용허가제(E-9 비자) 외국인 근로자에 한해 이뤄졌던 산업안전교육 의무 대상자를 확대했다.
이처럼 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각종 대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닮은 꼴'의 사고가 반복되곤 한다.
전문가들은 사고 우려가 높은 사업장에 대해 실효성 있는 감시와 제재를 지속하는 것이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정공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안전 관리는 교육이든 점검이든 결국 지속해서 이뤄져야 효과를 볼 수 있다"며 "특히 리튬 배터리 화재 등 상대적으로 생소한 화재 유형의 경우 전 국민을 상대로 실효성 있는 안전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 취지에 맞게, 관련 사고 발생 시 회장 등 가장 윗선에까지 실질적인 처벌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야 한다"며 "'근로자의 안전을 위시하면 업체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경각심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