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형 교육 답습한 서울대...한국 교육 문제의 집약체”

이진한 기자(mystic2j@mk.co.kr)

입력 : 2025.05.04 17:38:31
‘창의력 전도사’ 나선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대한민국 인적자본 바닥...창의적 지도자 나와야 韓경제 반등
M7 등 기술의 원천은 창의력
소수의 창의성이 먹거리 창출
서울대, 韓 교육문제 집약체


최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매일경제와 만난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혁신형 인적 자원 양성을 위한 창의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한국 거시경제학계의 석학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최근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이 창의력 교육 부재로 인적자본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며 “창의적인 지도자가 나올 때 한국 경제도 신성장 동력을 찾아 반등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월 정년 퇴임한 그는 약 20년간 서울대에서 창의력을 교육한 방법을 집약한 책 ‘어웨이킹’을 출간하며 대국민 창의력 전도에 나섰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장기성장률은 5년마다 1%포인트씩 추락해 올해 0%대로의 진입이 유력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매그니피센트 7(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아마존, 테슬라, 구글 모회사 알파벳, 메타 등 7개 기술기업)’ 중 하나인 애플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말 기준 3조9000억달러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이상”이라며 “이들은 기술기업으로 분류되지만, 그 기술의 원천은 창의력에 있다. 결국 소수의 창의력이 수천만명의 노동력보다 더 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기성장률 저하의 근본 원인으로는 잘못된 인적자본의 축적을 꼽았다. 김 교수는 “지식을 단순히 얼마나 암기하는지 평가하는 ‘모방형 교육’은 산업화 시기 선진국 따라잡기의 동력이 됐지만, 수십년간 답습하며 남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개발할 수 있는 본연의 경쟁력 확보에는 실패했다”며 “한국의 성장 추락은 당연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모교이자 국내 최고의 상아탑인 서울대에 대한 ‘쓴소리’도 뒤따랐다. 김 교수는 “한국의 수월성 교육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서울대는 현재 모방형 교육 답습이라는 한국 교육의 문제가 집약된 곳”이라며 “학교가 창조형 인적자본 배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만 35명을 배출한 미국의 시카고대학처럼 창의적인 인재를 배출할 때 국가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GPU없이 AI산업 뛰어들 참신함 절실
‘창의적 리더’가 ‘창의적 조직’ 만들어
최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매일경제와 만난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혁신형 인적 자원 양성을 위한 창의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지난 1월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오픈AI의 챗GPT 못지 않은 고성능·고효율 AI 모델을 선보이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15대 수출 주력품목에서 중국에 쫓기던 한국 입장에서는 AI 분야에서도 뒤쳐지고 있다는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최근 매일경제와 만난 김세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딥시크 쇼크’를 정면교사(正面敎師)의 사례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발주자였던 딥시크가 차별화된 전략으로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성공한 것처럼 산업 지형의 판을 새롭게 깔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최첨단 GPU가 부족하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GPU 없이도 AI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절실하다”며 한국 사회에 각성을 주문했다. 이어 “창의적 아이디어로 혁신을 이끌어낼 ‘창조형 인적자본’이 필요하다”며 “산업구조의 개편으로 사무직을 포함한 다수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가운데 새로 생기는 일자리도 창의력을 기본 소양으로 요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창의력 제고의 첫 걸음으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열린 문제’를 꼽았다. 사회적 통념을 깨는 비현실적인 상상을 통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면 혁신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는 “창의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키울 수 있는 힘”이라며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를 내뱉는 AI 시대에 창의력은 개인과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매일경제와 일문일답.

- AI의 발전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 먼 미래에서나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상의 기술들이 현실에 구현되고 있다. 경제학 분야라고 다르지 않다. AI는 이미 전통적인 계량경제학 모델보다 더 정교한 예측을 하고 있다. 코딩은 평균적인 경제학자들보다 낫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부분은 아직 사람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결국 독창적인 발상을 제시하는 분야에서 경쟁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 산업 생태계에도 막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 경제학자로서 AI가 생산성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아직은 ‘와일드 게스(wild guess·대략적 추측)’만 할 따름이다. 산업 현장에서 AI 사용이 본격화하면 모방형 지식 노동자 대부분은 대체될 것이다. 생산직은 물론 사무직 일자리도 대거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AI 기술을 통해 새롭게 창출될 일자리가 충분히 많을지는 미지수고, 그 일자리도 창의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 한국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할 계기가 될까.

▷ 한국은 현재 15대 수출 품목에서 후발주자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그나마 선방하고 있던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도 ‘초격차’를 잃었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기술 혁신에 실패한 탓이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장기성장률이 추락을 거듭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 사회에 ‘모방형 인적자원’만 가득한 결과다. 이를 바꾸지 못하면 반등의 여지는 없다.

- 정년을 맞아 ‘어웨이킹’을 출간한 까닭은.▷ 2006년 서울대 부임 이후 학생들에게 창의적 발상을 가르치면서 쌓은 노하우를 집약했다. 창의력은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3개월만 훈련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비현실적 상상하기, 논리적 상상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끊임없이 의문 던지기, 생각을 밀고 나갈 용기 키우기, 실패하며 계속 연습하기 등 일곱 가지 습관의 내재화가 시작이다. 5000만 국민이 읽으면 나라가 바뀔 것이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수업에서는 열린 문제를 통해 창의력 키우는 7가지 방법을 훈련한다. 책에서도 다양한 ‘열린 문제’를 제시한 까닭이다. 연평균 30도가 넘는 나라에서 얼음을 화폐로 도입하는 방법’ 같은 문제는 실제 수업에도 사용한 문제다. 이 같은 접근법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처음에는 평범하고 비슷한 답을 낸다. 정답에서 벗어나면 질타 받았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여섯 번째인 용기내기를 가장 어려워한다. 그러나 강의 중후반부로 가면 7가지 방법을 체화하며 점점 흥미롭고 독창적인 답을 제시한다. 학기가 끝나면 95%이상의 학생들이 창의력이 크게 늘었다고 답한다.

- ‘모방형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견도 많다.▷ ‘거인의 어깨에 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이 있다. ‘모방형 지식’은 거인의 어깨에 오르기 위한 준비 운동이다. 일정 단계까지는 기존의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천착해서는 안 된다. 결국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거인에게 질문해야 혁신에 성공할 수 있다. 거인의 어깨만 붙드는 수준을 넘어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서려면 창의력이 필요하다.

- 교육제도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하는 현재의 교육 방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주입식, 모방형 교육을 반복한다. 남이 만든 지식을 외우고,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는 창의력을 키우기 어렵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창조형 수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서울대의 역할도 중요하다. 모방형 지식이 아닌 창의력에서 수월성을 보이는 인재를 국가 지도자로 배출해야 한다.

- 입시제도로 ‘비례경쟁 선발제’를 주장했다.

▷ 지난 2015년 류근관, 손석준 교수와 함께 진행한 연구에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대입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비례경쟁 선발제’는 소득과 지역 차이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1단계에선 같은 지역(학교)끼리 비교·평가해서 대입 정원의 2~3배를 뽑고, 2단계에선 전국 단위의 경쟁으로 학생을 선발해 역차별도 막는 것이다. 이때 평가 기준은 창의력이다.

- 창의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나?

▷ 여러 평가자의 상호주관적 평가로 충분히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미 학계에서는 100년 이상 해온 방식이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때 무작정 내는 게 아니라 3~4명의 심사자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이들 모두가 충분히 독창적이라는 평가했을 때 정식으로 실린다. 지난 20년간 서울대 강의에서 ‘열린 문제’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창의력 평가에서 남들과 똑같은 답을 하면 누가 채점해도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 이공계 의대 편중 현상이 심각하다.

▷ 굉장히 나쁜 현상이다. 사회적 롤모델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라는 생각도 든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까닭이다. 서울대 정원이 약 3000명인데 그 중 이공계가 2000명 안팎이다. 현재의 학생선발 방식의 타당성을 떠나 지금처럼 의대 정원을 늘린다면 장래 스티브 잡스가 될 잠재력 있는 인재들의 이공계로부터의 대규모 이탈은 불가피하다.

- 창의적 조직을 만들기 위한 리더의 덕목은?

▷ 어떤 조직이건 리더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창의적이지 않은 지도자 밑에서 창의성은 나오지 않는다. 창의성을 강조하고 있는데도 성과가 없다면 구호만 외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다음은 혁신적 조직으로의 변화다. 모든 구성원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한 명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성공 확률은 10%도 안 된다. 그러나 30명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 중 하나가 성공할 확률이 100%에 가까워진다.

- AI 시대의 창의력은 과거와 다른가?

▷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똑같다. 다만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창의성을 현실에 구현하는 데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부분을 AI가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엇’에 대한 창의적 아이디어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앤비디아 CEO 젠슨 황이 “더 이상 코딩을 공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문할 것이 있다면?

▷ 인류의 수많은 문명사를 살펴보면 ‘창의적 아이디어’는 흥하는 나라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국가 지도자가 그 아이디어를 이끌어 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가 아이디어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아이디어의 가치는 비트코인에서 보듯이 2700조원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한국은 정부의 아이디어 공모대회에도 전국 1등 상금이 기껏해야 수백만원 수준이다. 그러면 수백만원 이하이의 아이디어만 나온다. 아이디어에 대한 획기적인 보상과 함께 채택된 아이디어의 재산권을 지켜줘야 한다.

창의성에 영감을 주는 인물로 딘스키·장자 꼽아
AI 시대 인문학, 창의력과 연결돼야 의미 있어
최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매일경제와 만난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혁신형 인적 자원 양성을 위한 창의력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 창의력의 중요성을 절감한 계기는.

▷ 미국 시카고대 유학 시절 한국 교육의 맹점을 확인했다. 방대한 경제학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 넣고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한국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에 비해 압도적인 성과를 보였다. 그런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떠올랐다. 그나마도 토끼는 자기 잘못이 크지만, 한국 학생들은 제도의 피해자 아닌가.

- 창의력의 동력을 어디에서 찾는가?

▷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라는 개념에 공감한다. 노는 데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예술 작품을 접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자극이 발생한다. 공상과학(SF) 영화나 만화 같은 콘텐츠도 자주 본다. 7가지 창의력 습관의 첫 단계인 ‘비현실적 상상하기’에 좋은 원천이 된다.

-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수업 시간에 자주 예시로 든다. ‘비현실적인 상상’의 사례를 보기에 적합한 교보재다.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도 좋아한다. 칸딘스키의 작품이 걸린 공간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비현실성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응원을 받는다.

- AI 시대에 인문학을 강조하는 의견도 많다

▷ 인문학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이공계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인문지식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력 훈련으로 연결돼야 한다. 장자는 창의력 배양에 가장 좋은 동양 철학자다. <장자> 첫머리에 등장하는 ‘붕(鵬)’은 한 번 날면 하늘을 덮을 만큼 큰 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비행기의 기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롤모델로 삼을 만한 한국인을 꼽는다면.

▷ 학생들에게 가장 창의적인 한국인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주로 나오는 인물이 두 사람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 장군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창의적인 인물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다만 동시대에 뚜렷한 창의성의 롤모델이 없어 아쉽다. 사회가 롤모델을 키우고 아끼고 응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수업을 듣고 감사를 표했던 송치형 두나무 회장같은 창의적 기업가가 학생들의 롤모델이 되길 바란다. 가상화폐 또한 상상의 산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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