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과 맞물려 양국의 조선 협력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조선 협력은 한국이 미국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어 한미 관세협상의 ‘킹핀’으로 꼽힌다. 특히 조선업계는 최근 존 펠란 미국 해군성 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의 조선 MRO(유지·보수·정비) 협력이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협력, 한미동맹 더욱 강화”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존 펠란 신임 미 해군성 장관은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를 방문해 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과 한·미간 조선 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펠란 장관은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에 직접 승선하고 건조 중인 차세대 구축함 다산정약용함도 둘러봤다. 이 자리에서 “이처럼 우수한 역량을 갖춘 조선소와 협력한다면 미 함정도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지난달 30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존 펠란 미국 해군성 장관(오른쪽 첫 번째)과 ‘유콘’함 정비 현장을 둘러보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화오션]
이날 오후에는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을 방문해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의 안내를 받아 거제사업장에서 유지·보수·정비(MRO) 중인 미국 해군 7함대의 급유함인 ‘유콘’함을 직접 둘러봤다. 지난해 11월 한화오션이 수주한 ‘유콘’함은 수리를 마치고 다음달 출항할 예정이다.
현장 시찰을 마친 후 펠란 장관은 “미국 해군과 대한민국 해양 산업과의 관계는 선박 정비를 넘어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을 위한 양국 의지를 굳건히 받쳐주는 초석”이라며 “양국간의 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업계서는 이번 방한을 한미간 조선협력 확대를 위한 신호탄으로 평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초부터 강조해 온 ‘미국 조선업 재건’ 기조 속에서 한국 조선사들과의 실질적 협력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 의회예산처의 ‘해군 2025 건조계획’에 따르면 미 해군은 2054년까지 364척의 군함을 구매할 예정이다. 해군 신규 함정 조달에 연평균 300억 달러(약 43조원)를 투입하고, 이들 전함의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에만 연간 최대 74억 달러(약 10조6000억원)를 배정한다는 계획이다.
美 자국 조선산업 보호법이 한미 협력 변수
우리 통상당국은 한미간 조선협력이 우리에게도 ‘윈-윈’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한미간 관세협상에서 조선협력이 협상 의제로 선정된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다만 한미 조선협력을 위해서는 미국 국내법 개정 등 만만치 않은 선결과제가 존재한다는 평가다.
국가안보를 강화하고 자국 조선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 관련법은 한미 조선 협력의 가장 큰 허들로 꼽힌다. 존스법은 미국 항만간 화물운송을 미국 선박으로 제한하며, 국가 안보 관련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면제를 허용한다.
군함 MRO 역시 법 개정이 필요한 상태다.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은 미국 군용 선박과 구성요소의 외국 조선소 건조를 금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영토를 모함으로 하는 해군 선박의 외국 조선소 정비, 수리, 또는 유지보수를 금지하는 미국 연방법(10 USC 8680)도 풀려야 한다. 이밖에 국방수권법과 국방예산법에서도 ‘국가 예산으로 외국에서 선박 건조 금지’를 명시하고 있는 상태다.
이정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미국은 조선 산업을 군사 및 상업적 이익을 동시에 지원하는 전략산업이자 국가 안보의 핵심기반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일부 우호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자국 조선업 보호여론과 일부 정치권의 강한 반발, 군사기술 유출에 대한 안보 우려 등으로 낙관하기 어려운 선결과제가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美 정치권도 ‘규제 완화’ 잰걸음
미국 의회가 조선업의 경쟁력 강화와 해양안보 확보를 목표로 관련 법안을 잇따라 발의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대목이다. 지난 2월 마이크 리 공화당 상원의원과 존 커터스 공화당 하원의원은 ‘해군준비태세 보장법’과 ‘해안경비대 준배테세 강화법’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에는 △나토 회원국 또는 상호방위조약 체결 인도·태평양 국가에 소재한 조선소 △미국 내 조선소보다 저렴한 건조 비용 △중국 기업 또는 중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이 소유 운영하지 않을 것 등의 기준을 충족할 경우 외국 조선소에서 해군 함정, 해안경비대 함정, 또는 주요 구성 부품의 건조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수석연구원은 “미국 의회가 관련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면서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과의 협력 기회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 의회에서 비슷한 법안이 폐기된 경험이 있는 만큼 통과 가능성을 예단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과거 존스법과 미국 선박법 개정에 대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회기 종료와 함께 별다른 진전 없이 자동 폐기된 경험이 있다.
낙후된 조선소·인력확보도 문제
한국 조선업계는 미국 투자를 포함한 현지화 전략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미국 내 낙후된 공급망과 인력부족, 높은 생산비 등 현실적 한계가 상존한다는 평가다.
현재 미국 조선업은 단독 또는 합작 형태로 국내 기업의 진출이 가능하다. 조선업계는 미국 내 선박·군함 건조 시 한국 대비 높은 운영 비용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미국산 선박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미국산 철강과 엔진, 발전기 등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국내 조선업계의 구조적 한계를 이겨낼 지원도 절실하다는 평가다. 특히 미국의 대중국 견제 강화는 우리 기업에 새로운 시장 진출과 기존 시장 확대를 제공하는 만큼 선제 대응이 긴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수석연구원은 “국내 조선업계는 수요 편중과 인력불균형 기술투자 정체 등 구조적 한계로 대외수요 증가에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선박 건조·보수·정비 역량 강화와 함께 연구개발(R&D) 인력 확충 등 및 세제·예산 등 정부의 전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